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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세 번째는 위고의 ‘징벌시집(詩集)’의 초판본(1853년)과 서한이 있으며, 시집에는 위고 자필의 헌사(獻辭)와 사인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토인비 박사가 덜레스 국무장관에게 부친 파키스탄의 평화를 호소한 서한, 독일의 대음악가 바그너가 ‘탄호이저(1845년)’의 연극에 대해 기록한 서한, 그리고 미국 독립의 영웅인 존 핸콕의 사인이 든 공문서, 그리고 유명한 바르톨로메오 반젯티의 서한이 있다. 특히 반젯티의 것은 그가 무고한 죄로 처형되기 직전(1927년), 재판소에 대하여 재심을 요구한 12쪽에 걸친 편지인데, 그중에는, “만약 자기가 사형되면 재판소가 살인죄를 범한 것이 된다”고 적는 등, 자유와 해방을 호소하는 “혼(魂)의 부르짖음”이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중보(重寶)들은, 말하자면 귀중한 역사의 유산이다. 이 밖에도 평화, 문화, 교육의 추진을 목표로 하는 SGI 운동의 일환으로서, 인류의 보배라고도 할 수 있는 물품들의 보존,
소개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활동이 미래에 깊은 의의를 간직해 간다는 것을 말씀드려 두고 싶다.
불법은 생명을 비추는 명경(明鏡)
여러분은 교양과 품격이 있는 여성이기를 바란다. 지성과 상냥함이 있는 여성은 아름답다. 주위 사람들도 신뢰하고 안심할 수가 있다. 또한, 신심을 깊이 할수록 지(知)의 세계가 풍요하게 넓혀져 가는 것이 불법(佛法)인 것이다.
리더의 현명함과 총명함이 없으면, 많은 사람을 이해시키고 행복으로 이끌어 갈 사명을 다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약간 어려운 면도 있을지 모르나, 거울을 통해서 중요한 신심의 본연의 자세에 대해 말해두고 싶다.
예로부터 일본에서는 ‘거울은 여인의 혼’이라고 한다. “무사(武士)가 칼을 놓지 않듯이 여성은 거울을 놓지 않는다.” 라는 말이 곧잘 쓰여 왔다. 이것은 어느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거울을 그야말로 잠시도 놓지 않는 여성도 많은 듯하다.
이 거울에는, 불법상(佛法上) 참으로 많은 의의가 있으며, 많은 비유로도 쓰이고 있다. 대성인께서도 “대체(大體)로 경(鏡)에 대해서 중중(重重)의 상전(相傳) 이 있노라.” (어서 724쪽)이라고 말씀하셨다. 특히 여기에서는 우리들의 신심(信心) 에 입각해서 간결하게 언급해 두고 싶다. 어서(御書)에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동경(銅鏡) 등(等)은 사람의 모습을 비추지만, 아직 마음은 비추지 못하느니라. 법화경(法華經)은 사람의 모습을 비출 뿐만 아니라, 마음도 비추느니라. 마음을 비출 뿐만 아니라, 선업(先業)도 미래(未來)까지도 비추어 보심이 흐림이 없도다.” (어서 1,521쪽)
거울은 눈에 보이는 얼굴과 모습을 비춘다. 불법(佛法)의 거울은 보이지 않는 생명(生命)도 비추어 낸다. 거울은 반사의 법칙 등 빛의 법칙을 응용해서 모습이 비치도록 연구한 인간의 지혜(智慧)의 산물이다. 어본존은 우주와 생명의 법칙에 따라서 그대 자신의 실상(實相)을 응시하여 성불(成佛)할 수 있게끔 한 부처의 지혜의 구극이시다. 용모를 단정히 하려면 거울이 불가결(不可缺)하듯이, 자신을 응시하고 인생을 응시하여, 보다 아름답고 보다 행복한 생활을 누려 가려면 생명을 비추는 거울이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앞의 어문(御文)에서 동경(銅鏡)이라고 있듯이 옛날의 거울은 청동(靑銅), 백동(白銅), 철(鐵) 등 금속을 갈고 닦은 것이었다. 주석 등을 섞어서 만든 듯하다. 이러한 금속 거울 중 최고(最古)의 것은, 중국, 이집트 등에서 만들어졌고, 더욱 옛날에는 돌의 표면을 갈아서 만든 거울, 또한 물거울 등이 있다. 어쨌든 거울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와 더불어 오래되었다. 자신의 얼굴을 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옛날의 거울은 현재의 유리 제품의 그것과는 달리 희미하게 밖에 비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처음 유리 제품 거울을 보았을 때, 사람들의 놀라움은 대단한 것이었다. 일본인이 최초로 유리 거울을 접한 것은 1551년 프랜시스코 쟈비에르가 전도를 위해서 일본에 왔을 때 가져왔다고 한다. 그러나일반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은 18세기가 되어서이다. 유리 거울의 보급은 19세기 후반이 되어서부터이다. 너무나 잘 비쳐서 이 거울만 보고 있었던 탓인지, 당시 사람들은 유리 거울을 두고 자만경(自慢鏡)이라고 불렀다. 풍속화(風俗畵)에도 거울을
들여다보는 여성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여기는 미국이지만, 일본의 독자를 위해서 일본의 역사를 소개했으나, 미국에서는 당연히 개척할 당시부터 거울이 있었다.
생명의 거울을 연마
옛날의 동경(銅鏡)은 잘 비치지 않을뿐더러 곧 흐려졌다. 그래서 자주자주 닦지 않으면 쓸모가 없었다. 대성인이 재세(在世)하신 가마쿠라 시대도 이러한 금속 거울의 시대였다.
일생성불(一生成佛抄)초에는 “암경(闇鏡)도 닦으면 옥(玉)으로 보임과 같도다. 지금(只今)도 일념무명(一念無明)의 미심(迷心)은 닦지 않은 거울이며, 이를 닦으면 반드시 법성진여(法性眞如)의 명경(明鏡)이 되느니라.” (어서 384쪽) 너무나도 유명한 일절이지만, 이 어문(御文)도 이러한 거울 닦기의 전통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어쨌든 어떠한 사람의 생명도 본래는 빛나고 반짝이는 명경(明鏡)인 것이다. 차이는, 그 명경을 닦고 있는가 어떤가이다. 닦으면 부처, 흐리면 미혹(迷惑)의 범부이다. 묘법을 부르는 것이 생명을 닦는 것이며, 우리는 자신도 이것을 실천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묘법을 가르쳐서, 그 생명의 거울을 빛내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생명의 거울을 닦는, 장인(匠人)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얼굴은 닦아도 생명은 좀처럼 닦지 않는다. 얼굴의 얼룩은 신경을 쓰지만, 혼의 얼룩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도리언 그레이의 비극
영국의 작가인 오스카 와일드(1856~1900)의 작품에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있다.
읽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 소설의 줄거리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미모의 청년인 도리언은 그 미모 때문에 ‘빛나는 청춘’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어느 화가가 그 아름다움을 영원히 남기려고 그의 초상화를 그렸다. 훌륭하게 그려져 그림도 굉장한 젊음과 아름다움이 넘쳤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도리언은 어느 친구의 영향을 받아, 점차로 쾌락과 악행의 길로 접어든다. 배덕(背德)의 생활, 그러나 그의 아름다움은 변함이 없었다. 젊음은 몇 년이 지나도 반짝이고 참신함 그대로였다. 한편, 초상화는 그의 타락한 생활상 그대로 조금씩 추하게 변해 갔다. 드디어 도리언은 어느 처녀를 농락하여 마침내 자살의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때, 초상화의 얼굴은 보기조차 흉할 만큼 사악하고 잔인한 표정을 띄우고 있었다. 도리언은 두려워 졌다. 이 혼의 얼굴은 추한 모습 그대로 영원히 남는 것이다. 도리언이 죽는다 해도, 그 진실을 웅변으로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도리언은 결심했다. 이 초상을 말살해 버리자! 이 그림만 없어지면 과거와 결별할 수 있다. 자신은 자유롭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그림을 나이프로 찔렀다. 비명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이 본 것은, 젊고 아름다운 도리언의 초상과 그 앞에 쓰러진 늙고 천한 용모의 사나이(도리언)였다. 사나이의 가슴에는 나이프가 꽂혀 있었다. 즉 초상은 그의 생명의 얼굴이며, 혼의 얼굴이었다. 그의 행동의 인과를 남김없이 새겨 넣고 있었던 것이다.
얼굴은 화장을 할 수 있어도, 영혼의 얼굴은 속일 수 없다. 하물며 인과(因果)의 이법(理法)은 엄연하다. 불법(佛法)에서는 음덕양보(陰德陽報) – 보이지 않는 선행(善行)이 보이는 행복의 보답으로 되어 나타난다고 설(說)한다. 불법(佛法)의 세계에는 전연 헛됨이 없으며, 표리(表裏)가 있거나, 표면(表面)을 장식해도 아무런 의미도 없다.
선악(善惡)의 인과(因果)를 새긴 혼의 얼굴은 어느 정도 표면에 실상(實相)으로 나타난다. 영국에는 “얼굴은 혼의 거울”이라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것은, 임종 때의 상(相), 얼굴이다. 도리언이 숨지는 순간 실상 그대로 추한 얼굴로 되돌아간 것처럼, 임종의 모습에는 그 사람의 생명의 얼굴이 뚜렷하게 비춰 나온다. 자신의 혼의 진실이 이때만은 속일 도리가 없어 나타나 버린다. 그 때에 후회하거나 당황하거나 괴로워하지 않기 위하여 현재의 수행이 있는 것이다.
관심(觀心) – 나의 생명의 불계(佛界)를 본다
‘혼의 얼굴’을 아름답게 닦는다 – 그러기 위해서는, 얼굴을 거울에 비춰서 단정하게 하듯이 생명을 비춰 주는 명경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 관심(觀心)의 어본존이시다. 조금 어려우나, 관심(觀心)의 본존초(本尊抄) 에는 관심(觀心)에 대해서 “명경(明鏡)을 향(向)할 때 비로소 자구(自具)의 육근(六根)을 보노라.” (어서 240쪽)이라고 말씀하셨다.
그와 마찬가지로 ‘관심(觀心)’이란 자신의 마음, 생명(生命)의 십계(十界)를, 그 중에도 불계(佛界)를 보아 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대성인께서 인류에게 주신 것이 관심(觀心)의 어본존(御本尊)이시다. 니치칸 상인은, “바로 본존(本尊)으로써 명경(明鏡)에 비유하도다. 이 어문(御文)은 바로 어본존(御本尊)을 명경(明鏡)에 비유하고 있다.”(관심(觀心)의 본존초(本尊抄) 문단(文段))이라고 말씀하셨다.
어의구전(御義口傳)에는 “묘호-렌게-쿄의 오자(五字) 는 만상(萬象)을 나타내서 일법(一法法)도 남는 것이 없도다.” (어서 724쪽)이라고. 어본존(御本尊) 이야말로 우주(宇宙) 전체를, 있는 그대로 비춰 내는 명경 중의 명경이시다. 이 어본존을 배례할 때, 우리 생명의 본래의 모습, 실상(實相)을 보며, 불계를 용현(涌現)할 수 있다.
그런데 현재와 같은 유리 거울이 발명된 것은,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이다. 시기는 여러 설(說)이 있으나, 거슬러 오르면 1279년경이라고 한다.
발명 당시 유리 거울의 제작 방법은 비중비(秘中秘)였다. 유리 기술자들은 어느 섬에 갇혀서 밖으로 제법(製法)이 새어나가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차츰 프랑스 등의 다른 나라가 알게끔 되어, 현재는 유리 거울이 과거의 거울을 일소해 버렸다.
말하자면 유리 거울의 광선유포(廣宣流布)이다. 어본존(御本尊)이라는 생명(生命)의 미(美)와 행복에의 명경도,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은 오랫동안 적었다. 우리들은 지금 그 광선유포(廣宣流布)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어본존(御本尊)은 생명의 명경이며, 우리들의 신심(信心)의 일념(一念)은 그대로 어본존(御本尊)에게 비쳐서 대우주에 반영된다. 이것이 일념삼천(一念三千)의 법리(法理)이다.
신심의 일념이 열쇠
사도의 문하(門下)인 아부쓰보에 대해서, 대성인께서는 “다보여래(多寶如來)의 보탑(寶塔)을 공양(供養)하신다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자신(自身)을 공양(供養)하시노라.” (어서 1,304쪽)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본존(御本尊)을 배례하여 장엄하게 하는 그대로 자신이라는 “보탑”을 장식하며 장엄하게 하는 것이다.
어본존(御本尊)을 배례하면, 당장에 우주의 일체의 불보살(佛菩薩)이 우리들을 수호하시고, 비방하면 그와 반대이다. 그러므로 어쨌든 마음이 중요하다. 신심(信心)의 일념(一念)은 미묘하다.
예컨대 근행(勤行)과 광포(廣布)의 활동에 때로는 “아아, 싫구나!”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은 그대로 거울처럼 대우주에 비쳐 간다. 말하자면 제천(諸天)쪽에서도 “아아, 싫구나!” 하고 생각한다. 이래서는 제천선신(諸天善神)의 진짜 힘은 나오지 않는다.
반대로, 무슨 일이나 “또 복운을 쌓아 나아가자!”라고 기꺼이 행동하면, 제천(諸天)도 환희하여 용감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차피 행동해야 한다면 그쪽이 이득이다. 또 “시간 낭비구나”라고 생각하는 일념(一念)으로 불도수행(拂道修行)을 한다면, 그 불신(不信)과 우치(愚痴)한 마음이 공덕(功德)을 지워 버린다. 그 결과 당연히 공덕을 자각할 수 없어, “역시 낭비였었다.”라고, 이상한 확신을 깊게 만들어간다. 이것은 악순환이다.
“정말일까?”라고 의심하면서 신심 하면, 그 약한 일념(一念)이 우주의 거울에 비쳐 공덕은 나오지 않는다. 강한 확신을 가지면 복운은 무한대이다. 어쨌든 이러한 미묘하고도 엄연한 신심(信心)의 마음을, 자신이 컨트롤하면서 청신하게 열어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나의 인생도 경애도 광활하게 열린다. 모든 것이 공덕에 가득 찬 생활로 되는 것은 틀림없다. 이 일념의 미묘함을 터득할 수 있는가, 없는가가 신심(信心)의 중요한 요체(要諦)이며 거기에 일생성불(一生成佛)의 열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의 속담에 “자신의 얼굴이 비틀어져 있는데 거울을 원망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고 있다. 비친 모습은 자기 자신인 것이다. 그런데 거울이 나쁘다고 화내는 사람이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생의 행, 불행은 모조리 자신의 생명의 인과의 모습이 반영된 결과이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신심(信心)의 세계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다.
거울을 모르는 사람들
옛날, 어느 시골에 거울이 없는 마을이 있었다. 거울이 귀중품이었던 무렵의 이야기이다. 서울에서 돌아온 남편이 선물로 거울을 아내에게 주었다. 그러자 처음으로 거울을 본 아내는 비친 여인의 모습에 “이것은 누구지, 그러면 서울 여인을 데리고 왔단 말인가”라고, 큰 싸움이 벌어졌다.
이것은 유명한 일본 희극의 하나이다. 우스갯소리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一念, 因果)이 비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인생의 여러 가지 현상을 보고 화를 내기도 하고 한탄하기도 한다. “이것은 누구일까. 나는 모른다!”라고.
불법(佛法)이라는 생명의 거울을 모르기 때문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응시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알지 못하면 당연히 다른 사람의 인생을 올바르게 인도할 수도 없다. 사회 현상의 본질을 간파할 수도 없다.
불자(佛子)는 서로 존경
인간관계도 또한 거울이다. 어의구전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불경보살(不輕菩薩)이 사중(四衆)을 예배(禮拜)하면, 상만(上慢)의 사중소구(四衆所具)의 불성(佛性) 또한 불경보살(不輕菩薩)을 예배하느니라. 거울을 보고 예배할 때 떠오른 그림자 또한 나를 예배(禮拜)하느니라.” (어서 769쪽)
이것은 홍교(弘敎)의 근본정신을 설하신 어문(御文)이다. 홍교란 상대를 가장 존경하고 그 불계(佛界)를 예배(禮拜)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추호라도 예의에 어긋난, 또한 비상식적인 오만한 행동이어서는 안 된다.
상대의 불계에 호소하는 마음으로 공손하게 온화하게 또 어떤 때는 엄부(嚴父)와 같은 자애(慈愛)로써 대화해 가야 한다. 그때, 상대의 불계가 거울처럼 이쪽의 성실한 모습을 비쳐 예배(禮拜)를 되받게 되는 것이다.
상대를 부처와 같이 소중히 하면, 상대의 불성(佛性)도 이쪽을 수호하려고 한다. 남을 경멸하고 얕잡아 보면 거울에 비춘 듯이 자신이 얕잡아 보이게 된다. 언젠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세계에 있어서는 그 순간에 인과(因果)가 새겨지고 있다. 그리고 시간과 더불어 그것이 뚜렷하게 나타나게 된다.
일반적으로 타인은 거울이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이쪽 태도가 상대에게 비춰져 간다. 하물며 불법(佛法)의 세계는 잘 닦아진 거울처럼, 인과(因果)가 뚜렷하다. 불자(佛子)인 회원을 최고로 존경하고 수호하고 보살피면, 시방(十方)의 불보살(不菩薩)과 제천(諸天)으로부터 수호를 받는다. 으스대면 으스댄 만큼 꾸중을 듣는다. 특히 리더는 이 한 점을 명확히 또한 깊이 자각해 주기 바란다.
우리는 불자(佛子)의 모임이기 때문에 서로 존경해 가면, 복덕(福德)은 거울에 거울을 비추듯이 무한히 확대해 간다. 혼자만의 신앙으로는 좀체 복운(福運)의 가속도(加速度)는 붙지 않는다.
요컨대 환경은 좋건 나쁘건 자신의 생명이 비친 결과이다. 그러나 인간은 좀체 그렇다고 자각할 수 없다. 모두 남의 탓으로 돌려 버린다. 어서(御書)에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들은(대성인을 박해하는) 자신의 난폭성(亂暴性)은 알지 못하고, 니치렌이 난폭(亂暴)한 듯이 생각했노라. 비유컨대 질투(嫉妬)하는 여인이 눈을 부릅뜨고 후처(後妻)를 노려보면, 자기(自己)의 혐오(嫌惡)스러움은 알지 못하고, 오히려 후처의 눈이 사납다고 함과 같도다.” (어서 1,450쪽) 대성인께서는 이처럼 대단히 알기 쉬운(웃음) 비유로 인간의 심리를 가르치고 계신다.
또한, 우리들 대성인의 문하(門下)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악의(惡意)로써 비난하고 박해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실은 정법(正法)의 세계가 거울이 되어, 거기에 자신의 결점과 야심 그리고 욕망이 투영되어, 그런 자신의 그림자를 향해서 욕설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자신이 권력(權力欲)에 눈이 어두워진 사람에게는, 아무리 사심없는 선행(善行)도, 권력(權力)을 얻기 위한 책모로 보이는, 그러한 경향성이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명리(名利)에 사로잡힌 사람은 신념과 진심의 행동도 매명(賣名)으로 보인다. 금전욕(金錢欲)의 노예가 된 사람에게는, 금전(金錢)에 사로잡히지 않는 인간이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조차 믿지를 않는다.
반대로, 너무나도 선의(善意)인 사람은 다른 사람도 그러려니 생각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크건 작건 반사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SGI의 벗도 선의의 덩어리 같은 사람이 많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호인(好人)이 되기 쉽다. 그래서는 패배자로 되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해야 할 말은 한다.
프랑스의 문호인 발자크는 말한다. “세상이라는 것을 아무리 나쁘게 말하는 자가 있어도 그자가 하는 말은 참말이라고 생각하라.” (골리오 노인(老人)). 그토록 악인이 많은 세상이라는 것이다. 또한, 세간이라는 것은 즉 호인(好人)과 사기꾼의 집단이다. 어느 편에 따라도 안 된다.
바르게 거기에다 강한 인생. 엄한 현실에 단연코 승리해 가기 위해서의 신심이다. 현명해져야 한다. 강해져야 한다. 또한, 광포의 조직에서도, 해야 할 말은 분명하게 해야 한다. 불법(佛法)은 권위와 리더에게 맹종하기만 하는 호인(好人)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현인(賢人)을 만드는 것이다.
부인부 여러분은 올바른 불법(佛法)의 올바른 실천을 배워주기 바란다. 만약이라도 리더와 남성에게 있어서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 있으면, “올바른 방향은 이쪽이에요”. “올바른 기준은 여기에 있습니다.”하고, 명쾌하게 주장해 주기 바란다.
대성인께서는, 남자는 화살, 여자는 활이라고 말씀하셨다. 화살은 활이 향한 방향대로 날아간다. 부인부의 여러분이 이처럼 가슴을 펴고 남성도 굳세게 리드하면서 씩씩하게 활약해 갈 때야말로 ‘새로운 SGI의 본격적인 개막’이라고 말씀드려 두고 싶다. 오늘의 연수회를 기념해서, SGI의 부인부 여러분에게 다음의 와카(和歌)를 선사하고 싶다.
“청아(靑雅)하고 또 아름다운 법화(法花)를 아메리카 전토(全土)의 이곳 저곳에”
끝으로 여러분의 다복(多福)과 일가(一家)의 안온, 그리고 SGI의 더 한 층의 발전을 충심으로 기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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